운하 유산신고

  경항대운하의 유산신고는 드디여 관건적인 단계에 들어섰다.

    금년 4월에 국물국에서는 2011년 대운하의 보호와 유산신고 작업회의를 주최하였다.대운하의 세계문화유산신고의 예비명단은 정식으로 나왔다. 이는 전국 8개성과 35개 도시를 언급하였고 132개 운하유산점과 43부분의 하항을 포함하였다. 현재 목표에 의하면 경항대운하는 2014년에 유산신고를 진행할 유망이 있다.

    절강성의 14개 유산점은 "즉시 항목에 지정"에 들어섰고 경항대운하의 가장 남쪽인 항주부분에만 7개의 유산점을 차지하였다 ——항주 봉산수성문 유지, 항주복의창, 양관구지, 통익공사공장 구지, 항주공서운하 역사거리(서교 역사거리, 소하직가 역사거리), 수력통판청 유지(건륭어비), 서흥과당행 및 부두.

  

수력통판청 유지(건륭어비):

 

    수력통판청에 대하여 많은 사람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건륭어비에 대하여 낯설지 않을 것이다.이는 당서수백거리의 예수성당의 서쪽에 세웠다. 지금 보면 석비는 총 약 3미터 높고 석비우에 쌍용안주의 조각이 있으며 석비에 있는 글자는 은약하게 건륭16년(1751)라고 씌여있다. 당시 홍역제가 남방으로 강서, 절강, 안휘 3성급에서 황량을 교납하는 상황을 순찰하였다. 결국 강서성과 안휘성은 거액의 빚을 졌지만 절강성만 빚을 지지 않았다. 절강성을 장려하기 위해 지정은 30만양을 면하고 "성유"를 석비에 조각하여 관민에게 명시하였다.

    운하 종합보호위원회의 직원의 소개에 의하면 얼마전에 어비의 북쪽에서 고고하는 중에서 고대건축의 유지 한곳을 발견하였다. 후에 바로 이곳이 명대시기 당서에서 증설한 슈력통판사의 유지라고 실증하였다.소개에 의하면 설립한 목적은 당시 이곳에서 도독이 드나들고 상업인을 강도하여 수상의 치안을 엄중히 위협하였다. 그래서 이 기관을 증설하여 도독을 잡고 겸하여 수력을 관리하였다. "증설부"의 최고 장관은 통판으로 한다. 통판은 지주, 지부의 조수이고 현대의 부시장과 해당하다. 현재 문화보호위원회에서는 아직도 이 유지에 대하여 진일보로 고고를 진행하고 있다.

양관구지:

  

     이 양관을 현재와 비교하면 "해관"과 비슷한 뜻이다. 광서22년(1896년)6,7월에 청정부는 항주에서 "해관"을 설립하여 항구를 열어 통상을 하였다. 당시 항주의 "해관"의 전칭은 "항주관세무사서" 즉 사람들이 말하는 "양관"이였다. 이는 항주에서 가장 중요한 징세기관이자 운하화물이 드나드는 요점이다. 

     현재 시 제2병원에 가면 양관의 구지를 볼수 있다. 3동의 2층짜리 홍석건축이였고 외모는 경춘로의 홍색아파트와 비슷하다. 시 제2병원 보위과의 늙은이를 만나면 그는 회상하면서 이 건축은 원래 4동인데 그중 하나가 얼마전에 철거하여 외래환자 진찰실로 개설하였다고 한다. 이 3동의 옛 건축은 작년에 성급 문화보호단위로 선발하였고 크게 수리를 한번 하고나서 현재는 사무용과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통익공사공장의 구지:

  

    공신교의 서안에 있는 부채박물관은 통익공사공장 구지의 소재지이다. 지금까지도 통익공사공장의 4동 옛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수공예술 활태전시관의 건축은 바로 당시의 생산작업장이였다.

    통익공사공장은 항주 첫 면방직공장의 전신이였다. 광서22년(1896년)에 건립되기 시작하였고 남심구의 대부자 방원제와 항주의 부자 정병, 왕진원 등 사람이 같이 의논하고 기획하여 주식을 모집하여 8년을 거쳐야 착공하게 되였다. 1956년에 항주 첫 면방직공장이라고 갱명하였고 이는 항주의 근대공업발전을 증명하였다. 2009년에 통익공사공장은 보호와 이용을 완성하였고 중국 부채박물관으로 개설하여 공업유지의 매력을 계속 전시하고 있었다.

 

항주공서운하 역사거리(서교 역사거리,소하직가 역사거리)

 

    소하직가의 역사는 당송시기 항주시 외곽의 한 초시에서 기원한것이다. 원대에 들어서서 점차적으로 고대 항주시 외곽의 교통요점으로 되였다. 청대에 들어서자 상업거리와 수육부두로 발전되였다. 현존한 거리의 풍모는 청조말기부터 민국시기에 보존해 온것이다. 당시 이 일대는 운하를 빌어 상당히 번영하였다. 술 작업공장, 장류 공장, 철가게, 정미가게 등 상업가게가 많았고 전 세기 80년대 후기에 점차 사라졌다. 2008년 역사거리에 대하여 종합보호를 진행하였고 2009년9월에 96호의 원주민을 이주하고 재건축하여 정식으로 거리를 열기 시작하였다. 

    서교의 역사거리는 북쪽 항주 첫 면방직공장의 창고로 부터 시작하여 남쪽 등운교의 북측까지 이른다.서쪽은 소하로로 부터 동쪽 경항대원하까지 이른다. 옛날 청조 동치년간부터 공신교지구에서 번영한 수육부두이 되였다. 다름없이 2008년에 종합보호공정에서 122좌의 합원주민, 청석판로, 장대선묘를 회복하였다. 이외에 또한 중심거리차재회공소와 토산품창고의 유지부두를 볼수있다. 이는 모두 운하문화의 대표이다.

 

복의창:

 

    운하와 성리교의 합류처에 늙 저택이 흰색벽으로 둘러싼 한곳을 볼수 있다. 남면의 정대문으로 들어서면 "복의창"란  세글자가 볼수 있다.  

    복의창은 청조 광서6년(1880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당년에는 남쪽의 약식을 북쪽으로 운송하는 화물역이고 항주 각지 양식의 집중지이다. "천하양식창고"라고 불리였고 후에 양식창고를 비여 일부분을 군사구역의 가족 숙사와 항주 조선소 직원숙사로 개조하였다. 그 후에 한차례의 화재가 일어나 복의창은 불에 타서 원 모습을 찾을수가 없었다. 단지 3례의 창고와 장치용의 물부두만 남겨졌다. 2007년 "다행이"남긴 복의창을 다시 건설하여 현재 개조한후의 복의창은 아이디어단지로 전업하였다. 이로하여 "물질양식창고" 로부터 "정신양식창고" 로 전신하게 되였다. 작년에 국가 1급 연예인 조지강의 주목을 받아 복의창에서 개인작업실을 개최하였다.

 

항주 봉산수성문유지

 

    중산남로에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면 중하로와 교접하는 곳에 봉산수성문이 중하로에 가로 세우는 장면을 볼수 있다. 성문의 양쪽은 사실 이미 끊어지고 중간의 아치형 한 단락만 남겨졌다. 웃쪽은 보기에 성벽과 같았다. 아치형의 상방은 "봉산수문"이란 네글자가 씌여있고 이는 항주성에서 유일하게 보존해온 600여년의 고대성문이였다. 원조시기에 건설하기 시작한것이고 듣는 말에 의하면 성문안에 한동의 성곽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성곽은 백여명의 병사를 용납할수 있고 적의 병사가 기습하는것을 방어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갑문을 제어하여 하수를 조절할수 있다고 하였다. 후에 성곽이 무너졌다. 20세기 80년대 중하를 다스리면서 원래 수성의 모양에 따라 수복을 진행하였다.

 

서흥과당행 및 부두

 

    빈강구의 서흥 옛거리 관하연안에 가면 많은 남겨진 "과당행"을 볼수 있다. 1,2층의 집이고 외관모습은 크지 않아 단 2,3개의 칸살면이였다. 보기에는 여인숙과 가게 같다.

    서진시기에 이미 서흥운하를 굴착하기 시작하여 서행일대의 부두를 절동제일부두라고 불리였다. 이로 하여 일종의 특수한 업종——"과당행"이 산생되였다. 말하는바에 의하면 이런 "과당행"은 보통 수육부도,교통요점에 설치한다. 주요로 어음의 교환과 화물을 갈아타는 작용을 이르킨다. 과당행 자체는 창고와 비슷한 공능의 건축이 필요없다. 수백년래 절동지구에서 무수한 양식,면,견직물,소금과 술,산물이 서흥에서 과당하여 갈아 타서 중원지구에 운송되였다. 

    현재 광당행건축은 서흥 옛 거리에서 아직도 적지 않다. 대부분은 청조말기 민국시기초에 건축된것이다. 예를 들면 심위전과당행, 관하로112호건축, 관하로102, 103, 104호 등이다. 이것은 운하의 번영한 발전을 직접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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